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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readings &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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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승만 대통령

페이지 정보

조회 : 1,182   등록일 : 2018.10.09 08:47

본문

 

부산 순회강연 (2018, 10, 5)

이승만과 대한민국

이영훈
(이승만 학당 교장)

1948년 2월의 일 입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38도선  이남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지 여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였습니다. 남한의 유력 정치인들 사이의 의견이 심각
하게 대립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김구와 김규
식은 총선거의 시행을 반대하였습니다 반면에 남한의 자유민주 우익세력을 대표하는
이승만은 필사적으로 총선거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최후의 담판이
미 군정의 하지 사령관의 주재로 열렸습니다. 하지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을 초청했습니
다.

하지가 장황하게 1시간이나 총선거를 시행할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렇지만
김구와 김규식은 끝내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 최후의 협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면에

이승만은 그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우리가 지난 35년간 독립을 여러 외국에
외치고 여러 국제회의에 참가하려고 노력했지만 번번히 거절을 당하였다.
이제 국제사회가 독립의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는데, 제주도만이라도 독립의 정부를 세우면
국제사회에 나가서 우리의 주장을 펼칠 수 있지 않느냐,
그 기회를 왜 놓치려고 하는
가 당신들은 당신들이 옳다고 믿는 길을 가라 역사의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렇게
외쳤습니다.

당일 그 회담에 참가한 미군정의 자문관들은 김구와 김규식이 역사의 결정적 국면에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할 마당에 어떠한 대안도 없이 자신의 책임을 회
피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나라는 이승만 박사의 책임으로 세워진 나라였습니다. 그는 외쳤습
니다.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공산주의와 타협하라는 것은 불이 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것과 같다. 공산주의와 타협하면 이 민족은 다시는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고 만다. 몸이 반쪽에 병이 들었으면 나머지 반쪽의 건강을 먼저 지킨 후 나머지
반쪽의 건강을 회복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어찌해서라도 좌우합작을 해서 통일국가를 세우는 것이 긴요한 일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민족 분단의 원흉이라고 비난해 왔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제 역사가 그로부터 70년을 흘렀습니다.
당시 세계사의 진행은
캄캄한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있습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인류의 밝은 미래를 인도하는 등불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승만 박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일찍이 1922년에 '공산당의 당부당
이란 논문에서 공산주의를 시행하면, 개인의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자본가의 재산을
빼앗아 골고루 나누면, 그것으로 인해 인류 문명의 발전은 중단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1933년 소련을 실제 여행하면서 그 같은 공산주의 소비에트의 현실을 직접 체
험하였습니다. 모스크바의 어느 호텔에서 묵었습니다. 밤중에 호텔 직원이 찾아와서
자기를 미국으로 데려갈 방도가 없는지를 부탁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배가 고파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소련 정부는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추방하였습니
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그는 여러 사람의 미국인과 동석하였습니다. 열차가 소련의
국경을 벗어나자 그들은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 길거리에 시체로 넘어져 있는 농촌
현실을 목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렇게 이승만은 오래전부터 공산주의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했
기 때문에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 한반도가 소련의 점령 하로 들어갈 가능성을 가장 경계하였습니다. 2차 대전 이후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좌우합작의 유
혹에 빠져서 공산주의 자들과 협력해서 정부를 세웠습니다. 헝가리가 그러하였고 체코
가 그러하였습니다. 그 뒤에 일어난 사태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정부에 참여한 공산
세력은 유명한 자유주의 정치가를 하나씩 테러로 제거합니다 그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공산당에 포섭된 경찰 조직이 쿠데타를 행하여 정부를 전복한 다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혁명을 위한 정부의 건립을 선언합니다.

이승만은 그렇게 하나둘씩 공산화가 이루어지는 전쟁 후 동유럽의 사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46년 12월 이승만은 미군정의 박해를 피해 미국의 여론에 직접 호소하기 위
해 미국을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동행한 이승만 박사의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는 우리는 워싱턴에서 백안관이 보이는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어떻게 해서 동유럽
에서 벌어지는 그 공산화의 비극을 남한에서 막을 수 있을 것인지를 토론하였다고 회
고하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승만이었기에 그는 좌우합작을 한사코 거부 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점령군 소련의 일사불란한 지도와 감시 하에서 공산화가 사실상 완성된 상태였습니


1946년 3월 북한에 세워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전격적으로 토지개혁을 실시
하였습니다. 3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들의 토지를 빼앗고 무상으로 분배하였습니다

내려온 사람들이 1948년까지 대략 70만 명에 달하였습니다. 사실상 분단이 현실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분단을 항해 먼저 달린 것은 북한의 공산세력이었습니다.
북한은 1946년 여름까지 전 공업시설의 90% 이상을 국유화하였습니다 그 해에 김일성대학을 세우는 등, 전체주의적 동원체제와 우상숭배가 인민을 억누르기 시작했습니다

1947년 말이 되면 북한에서 공산주의체제의 성립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도
달하였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한 좌우합작은 남한의 정치와 국민은 분열시키기 위한
정치적 구호에 불과했습니다.
지주들은 고향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그럼에도 김구와 김규식은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통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평양에 올라가서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에 참가했지만, 김일성을 중심
으로 한 북한의 공산세력이 짜놓은 각본에 따라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도
북한의 공산세력은 소련의 지시와 승인 하에 헌법을 제정하는 등, 독자의 정부를 수
립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남한에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끝내 총선거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에 대한 반대의 선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두 사람은 1948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해 12월 유
엔총회가 열릴 때 대한민국을 승인하지 말도록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아。

그렇게 우리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책임 하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그 모든 과정은
그가 믿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조용한 기도 속에서 결정되고 결행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낚시를 하거나 전
지를 하는 몇 시간은 거의 절반이 기도였다고 합니다.
그 기도로 그는 지혜를 얻고,
용기를 가지고, 결정을 했으며, 불퇴전의 결의로 추진하였습니다.

그것이 73 세에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마지막 12년간 이었습니다.

남한의 총선거, 자유민주주
의 국가체제 건립, 대통령중심제 정부형태, 농지개혁, 국가보안법, 대통령 직선제,
양원제 국회, 지방자치, 귀속재산의 불하, 전쟁의 방어, 반공포로의 석방, 한미군사동맹,
자유시장경제체제, 전후 복구, 기초공업의 건설, 교육혁명 등 그의 통치 12년에 이루어진 여러 과업은 이후 장기 지속하는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결정하여, 후속 세대가 고도성장을 이룩하는 토대를 구축하였습니다.

이승만이 기독교인으로 변신하는 것은 1899년 2월 경이었습니다.

1894년 그는 선
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초 영어를 배워 정부에 무슨 쓰
임새가있을까 하는 기대였습니다

거기서 자유민주의 이념과 철학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를 미국과 같은 민주정치의 나라, 자유인의 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한
혁명가로 인생을 살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는 한성회보, 매일신문, 제국일보와 같은
한국 최초의 일간 신문을 발간합니다. 나아가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 에서 이나라의 애국계몽을 위한 얼혈 청년으로 활동합니다.

그러다가 고종황제를 폐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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